본문 바로가기

스페셜 리스트/미디어 아트

신체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

신체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을 뉴 미디어를 이용해 어떻게 깨워낼 것인가 

마사키 후지하타



- 가상과 실제에 대해 모니터 건너편과 이편이라는 관점에서 의견을 말해 달라.


 누군가가 ‘비디오는 수평선을 없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거실에서 텔레비전의 화면으로부터 걸프 전쟁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최대한 먼 장소는 수평선이었지만, 테크놀로지에 의해 그보다 더 먼 곳까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각뿐만 아니라, 신체가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가상의 여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각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팽창(expand)과 수축(shrink). 즉,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외부로는 점점 두려울 만큼의 틀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자신에게 있어서의 리얼리티를 확인하는 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컴퓨터 그래픽스를 하기 시작한 지 4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 모니터 상의 3차원 입체를 컴퓨터 그래픽 영상으로서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지독한 좌절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을 만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 데이터를, 수치 제어의 공작 기계를 사용하여 입체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높이 5m 정도에 앞에 볼과 밀이라는 드릴 날과 같은 것이 달려 있어, 그것이 3차원적으로 x, y, z 축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어 있는 커다란 기계였다. 그 3차원 데이터를 공작기계에 전송하면, 그것이 가가가...소리를 내며 조각해주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전혀 실체감이 없었다. 1미터 20센티미터로 만든 것도 30센티미터로 만든 것도 사진을 찍어 슬라이드로 보면, 어느 것이 큰 것이고 어느 것이 작은 것인지 구분이 안 된다. 즉, 컴퓨터 속에 만들어진 것은 외부로 나오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컴퓨터 속에서 밟아 온 프로세스 속에서만 리얼리티를 갖기 때문이다. 


 이는 ‘computer generated sculpture’로서 전시되었으나, 관람객은 그것을 조각으로 보고 말았다. 조각이란, 절대적 공간 속에서 절대적 오브제가 아니면 안 된다. 컴퓨터로 조각을 만든다는 것은 ‘조각’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컴퓨터 속에 실체 없는 그 무엇을 만들어낼 때, 어디에 인간 쪽의 리얼리티의 소재(所在)가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네트워크 테크놀로지란 미디어의 변화가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감각에 매우 큰 작용을 미쳐왔다. 그 가운데 본인의 시도가 시대와 어떻게 관계 맺어왔는가.


 92년에 ‘Removable Reality'라는 전시회를 이리에 케이이치와 열었던 것이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감상자가 적외선 무선 헤드폰을 쓰고 그 장소에 부여된 소리 속에서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헤드폰을 쓰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소리만이 갖는 리얼리티의 세계와 헤드폰이 없는 일상 세계란 두 가지 세계가 같은 장소에 공존하고 있었다.


 컴퓨터 테크놀로지 덕분에, 알기 쉬운 형태로, 사물, 이미지, 언어, 기호란 4자 관계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우리들이 평소에 전혀 의문을 갖지 않는 리얼리티라는 것을 조금 벗어나게 한다든지, 전혀 다른 리얼리티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가진 리얼리티의 소재(所在)란 것을 어떻게 뒤흔들어낼까, 라는 데 깊은 흥미를 갖고 있다. 그러한 미디어, 그러한 도구, 그러한 소재(素材)를 가지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Masaki Fujihata, '' in : マルチメディア社會と變容する文化 (인터코뮤니케이션‘96 /ICC 국제심포지엄 자료집/ 인터뷰 Tokyo 1997) pp. 112-117
 

-네트워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금 전에 라디오로 들은 광고가 재미있었다. ‘휴대전화를 샀는데 아무에게도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아요.’ ‘그건 친구가 없어서겠지.’ (웃음)


 네트워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정말 인간의, 사회의 문제이다. 정보의 유통 같은 걸 말하기 전에, 인간 쪽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폭력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혹은 사랑이 어떻게 네트워크로 송신(transmit)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 해상도와 문맥을 지금의 네트워크 미디어는 갖고 있지 않다.


 지금의 기술은 정말 준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에 걸쳐 과학과 기술이 한계에 이르렀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학제적으로 자유롭게 토론(discussion)하고,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던 장밋빛 전망으로 물든 시절도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토론(discussion)이 아니라 새로운 타입의 엔지니어나 과학자, 표현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나타날 때, 네트워크의 문제란 것도 변해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 <Global Interior Project>에 대해 말해 달라.


(* 1995년 11월 [Intercommunication'95 'on the web; the museum in the network]전에서 프로젝트 #1로서 발표되고, 그 후 96년에 버전 업된 프로젝트 #2가 SIGGRAPH '96, Ars Electronica '96, DEAF '96에서 전시되고, 프로젝트 #3이 같은 해 [IWE '96 DNP pavillion]에서 전시되었다. Ars Electronica ‘96의 Interactive Art 부문 그랑프리, Golden Nica상을 수상하였다.*)


 그 전시공간에서 아마 30% 정도의 사람들은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나가버렸던 것 같다. 거기에 놓인 사각형의 상자의 표면만을 확인하고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새로운 전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는 미술의 전시, 미술의 감상이라는 구조 그 자체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작품이다. 


 유저가 액세스하는 터미널이 서너 개 있고, 가상 스페이스 속에 18개의 방이 있다. 유저는 각각의 터미널로부터 들어간 방 속을 빙빙 걸어 다닐 수 있다. 또한 창문으로부터 옆방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때 만일 그 곳에 타인이 있으면, 그/그녀는 아바타라는 가상 오브제로 나타나게 된다. 그 아바타의 표면에 비춰진 상대방의 얼굴 영상을 보면서, 직접 대화할 수 있다. 이는 우리들이 신체라는, 정신으로부터 보면, 일종의 가상의 형태를 가진 육체를 두르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세계를 매우 단순화시켜 재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현실 공간 속에 한 변이 30센티미터 크기의 사각형의 상자가 각각의 가상공간의 방에 대응하여 18개 쌓여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귀의 방’에 있으면, 현재 공간의 ‘귀의 방’에 해당하는 방의 문이 열려, 거기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 주변 사람들도 알 수 있게 되어있다. 가상공간(virtual space)의 실재(existence)가 현실 공간(real space) 속에서 문이 열리고 닫힘으로써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실은, 여기에 한 개 더 신기한 선을 그어두었다. 현실 공간의 18개의 상자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가 있어, 그 영상이 가상공간의 벽에 붙여진다. 가상공간에 들어간 사람이 그 벽에 붙여진 영상을 클릭하면, 갑자기 펑하고 그 방이 없어지게 된다. 


 현실에 갖고 있는 것, 그것도 현실을 촬영한 영상이 가상공간 속의 실제에 기능하는 스위치가 된 것이다. 이는 가상 모델이 사실은 가상 세계를 표현하고, 나아가 실제의 것으로 변해감을 말하고 있다.  


- 한편으로는 사회의 가치관이나 역사라는 기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개인이 있다. 예를 들어 <Beyond Pages>에서는 사과를 베어 먹는 콘텐츠가 있기도 하고, 혹은 잎사귀가 사각사각 흔들리기도 하는, 누구든 갖고 있는 기억이란 것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누구든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다. 


(*1996년 게이오대학 SFC에서 열린 [The Future of the Book of the Future] 전에서 최초로 발표되고, 그 이후, SIGGRAPH'96, ISEA '96을 비롯하여 미국 프랑스 각지에서 전시되었다. 2008년 현재도 세계 각지에서 전시 중*)


 <Global Interior Project>의 경우, 18개의 방이 각각, 손이나 귀라는 감각 기관, 그리고 집, 미디어, 전쟁, 섹스, 종교라는 식으로 의미 부여되어 있다. 자신의 움직임에 의해 세계가 변한다든지, 재구성된다고 이해해 주길 바랐다. 


 이는 극도로 추상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Beyond Pages>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현실에 있는 물건을 사진으로 찍어, 그 사진의 디지털화된 이미지가 테이블 위 책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보는 이는 자신이 현실 세계와 일상적으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과, 이 책 위에 집약되어있는 컴팩트화되어 표현된 것과의 사이에 있는 어긋남을 읽어낼 수 있다. 


 - 21세기에 아티스트는 어떻게 변해갈까.


 20세기의 아티스트란 아트가 갖고있는 아이디어나 창의성 (creativity)를 어떻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후반에는 그에 성공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런 식으로 계속 잘 풀려나가지 않게 되지 않을까.


 나는 엔터테인먼트와 아트가 완전히 다른 것이란 사실을 일본인들이 좀 더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들은 좀 더 목적을 가진 창작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길 바라는지 좀 더 명확히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처럼 극도로 빈곤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작업이 긴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 일본인들은 위기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서, 이대로는 잘 풀려나갈 것 같지가 않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책임을 지고 자신을 존경할 줄 알며 삶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고서, 상대방도 그와 같은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 표현이라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고 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보다 솔직하게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새로운 미디어가 사용되는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으며, 그것이 철저히 행해졌을 때야 비로소 다양한 사물의 구조가 급격하게 변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속화시킴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보여줄 줄 아는 것이 아티스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15년에서 20년 정도, 다양한 형태로 테크놀로지를 상대해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최근 들어 역시 스스로가 미술을 무척 사랑하고 있으며, 매우 풍부한 영향을 미술 세계로부터 받아왔음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 때 과거의 문화나 예술, 미술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 때 인터랙티비티는 유효한 수단일까.


 최근 수 년 동안, 인터랙티브한 작품을 만들어 온 결과 정말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인터랙티브한 작품은 유저에게 체험을 강요하게 된다는 점이다.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컨트롤 되지 않는 상황에서 작품과의 체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은 새로운 자연이다. 인공적인 자연으로, 그 장치 자체가 하나의 환경으로서 설정되고, 거기서 지시를 받으며 체험이 행해진다. 더구나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그 각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할 수 있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미술관 이외의 장소에서 세계란 것을 다시 한 번 새로이 바라볼 계기를 부여할 장소가 컴퓨터와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있다.


 이미지, 사물, 기호, 언어가 근간에 있고, 그 위에 우리들의 기억 - 언어의 기억 뿐만 아니라, 시각적 기억, 촉각적 기억도 포함하여- 이 능숙하게 재현되지 못한 채로, 신체 속에 잠들어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기억을 어떻게 깨워낼 것인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살아있게(능동적으로active) 한다고 생각한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든답시고, 기억을 저장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들고자 하는 작품은 기억이 극도로 리얼한 형태로 몸속에서부터 되살아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미술이자 예술이며, 뉴미디어의 새로운 사용 방법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다 더 좋은 점은, 그것이 이야기일 필요성이 없다는 점,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유저에 의해 편집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처럼 보이지 않는 아카이브를 다시 한 번 스스로 객관적으로 보고, 조작하고, 꺼낼 수 있게 할 수 있도록 하는데도 이러한 기술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술과 표현의 문제에 대해, 즉,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흥미를 갖는 이유에 대해 늘 깊이 고민해왔다.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을 때, 가까이 있는 테크놀로지가 무엇이든 좋으니 사용해서 표현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컴퓨터 아티스트라고 항상 말해왔지만, 그냥 아티스트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을 생각하면, 후지하타 마사키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디어입니다’란 대답이 가장 옳을 것 같다.




미디어 아트의 테마는 무엇인가?

후지하타 마사키(藤幡正樹) 



이제까지 미디어를 테마로 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은 그 이전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왔다. 그 표현의 가능성을 넓혀가는 것이 아티스트이며, 또 그것이 표현의 구현자에게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아티스트도 미디어 기술, 컴퓨터와 연관된 기술에 정통할 있었다. 동시에 정보공학의 현장으로부터 다양한 아이디어를 받는 경우도 있고, 그러한 현실을 통해 내 자신의 테마도 명확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현실을 더 확장하고, 풍부한 표현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새로운 미디어는 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원점으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미디어의 문제를 고찰해 보고 싶다. 


작품을 읽는 스타일 


연필을 볼펜으로 바꾸면 종이의 감촉이 변하며 문장이 미세하게 변해버린다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 쯤 해 보았을 것이다. 각각의 화재(畵材)에 각각의 특징이 있어, 그림을 배우는 시간은 각각의 재료(material)의 취급방법을 배우고, 차이를 인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재와 화재와, 자신의 내부의 표현 충동과 같은 것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면, 그 사람 독자의 표현의 세계가 출현한다. 결국 도구와 표현은 떼어놓기 힘든 관계에 있으며, 만들어진 작품과 그것의 내용을 이루는 세계관은 거기서 실현되는 도구와 소재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그때야말로 작품에게는 가장 행복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작품에 접하는 감상자의 다수는 그 배후에 있는 작품생성의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보통 고려하지 않는다. 때문에 도구와 소재가 표현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분석적인 감상에 의해 발견해내는 것은 전문가(동업자의 눈이라고 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의 눈이며, 일반의 감상자는 단순히, 혹은 순수하게 작품에 감동을 받을 뿐이라고들 한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도,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가 만들어낸 “작품은 당신의 순수한 감성만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일반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런 의식과 태도를 심어주고 만 것이다. 그러한 순수성이란 실은 그저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으로 본다(感性)거나, 두뇌로 본다(論理)거나 하기 전에, 아주 간단한 의미에서의 그림을 보는 방법의 단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우선 첫째로 구체적으로 화면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생각하고, 그것이 무엇에 의해 ‘어떻게’ 묘사되어 잇는지를 볼 것이다. 그 다음에 작자가 이 테마를 이렇게 묘사한 것은 ‘왜인지’, 그 이류를 탐구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감상의 단계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1) ‘무엇이?’, 2) ‘어떻게?’를 보고, 그 위에 3) ‘왜?’가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이’ 묘사되어 있는가?


미술전에서 관객들의 움직임을 관찰해 보면, 대다수는 우선 작품을 슬쩍 보고 나서, 이어 작품의 타이틀을 보곤 한다. 이는 ‘이 그림에 도대체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라는 물음에 제목이 대답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테마도 모르는 채 보면 그저 인물의 얼굴이 무섭다거나, 혹은 귀엽다는 인상 밖에 못 읽어낼지 모른다는 불안이 관객 측에 있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대부분의 경우 그 작품의 타이틀은 작품의 테마를 말해준다. 서구 회화에는 일반적인 역사적인 테마가 존재하며, 일본화에는 일본화의 화제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타이틀을 읽을 수 있다고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이틀의 해제에는 물론 감상자의 지식의 양이 영향을 끼치며, 고전적인 테마라면 어느 정도 미술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경우에는 테마가 작품 밖에 미리 존재하는 것이어서 지식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무엇이?’라는 의문문에 대한 답변은 거기에 있는 그림과는 별도로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것으로, 이는 사전에 어느 정도 공부를 해둘 필요가 있다. ‘무엇이’에 대한 이해는, 작품과 해설이라는 두 개의 감상이해행위에 의해 완결되는 것이다.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어떻게?’라는 물음은 기본적으로 눈앞에 있는 작품 그 자체를 봄으로써 해독해내야 한다. 얇게 발라진 캔버스, 핒ㄴ젤의 움직임, 색채의 선택, 어디까지가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며, 어디부터가 소재로부터 오는 제약과 가능성인지를 안다면, 그것이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알게 된다. 우리는 흔히 ‘인쇄물이 아니라 실물을 잘 보세요.’라고 말한다. 이는 인쇄물에서는 얻어낼 수 없는 정보를 실물로부터는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전문적인 독해의 영역에 닿아 있다. 유화를 제대로 읽으려면 유화를 그려봐야 한다. 테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라는 형이상학적 이해만으로 회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실현과정에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가, 어떤 계획이 있었던가를 앎으로써 더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 등 한자문화권에서 서예에 대한 이해가 발달해 있는 것은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서도에 친숙한 관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붓으로 문자를 쓰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근대서양의 예술개념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던 것은, 유화라는 도구로 그려진 서양회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시대에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새로운 미술을 서예의 모필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려고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왜’ 묘사되어 있는가 


그러면 어떤 테마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읽어 보기로 하자. 읽어낸다면 읽어낸 것 뿐, 나아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테마와 기술의 문제와 별도로 ‘왜’ 작가는 이것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그 작품이 ‘막달라 마리아의 테마를 유화로 제작’하여 일정액의 돈을 받기로 한 것이라면, 아마도 ‘왜’라는 물음은 작가에게 돌아가지 않을 이다. 이는 일러스트의 발주와 비슷하여 묘사의 능력을 팔아 청탁받은 일을 해주는 데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작품에서는 ‘코미셔너가 왜 이 작품을 이 벽에 발주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파노프스키와 곰브리치가 20세기에 개척한 도상학 연구가 이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회화는 그리는 사람만으로 성립하는 게 아니라 문화사회적인 맥락 속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가르쳐 주기에 이르렀다. 도상학 연구에서 회화란 상징이 복잡하게 들어 있는 평면이다. 그것은  기교의 문제 이전에 구석구석에서 거기에 묘사된 상징이 보여주는 의미를 해독하는 기술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미디어 아트 읽는 방법, 그것의 불행 


이 감상의 스키마를 미디어 아트에 적용해 보자. 그러면 미디어 아트가 이중의 의미에서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미디어 아트 역시 현대에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거기에도 당연히 현대예술 감상의 스키마가 사용된다. 하지만 현대예술의 가치개념은 기술의 문제를 표현의 실현을 위한 하위 레벨의 문제로 간주한다.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필요는 없고, 그 일의 수행을 전문가에게 맡겨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어디에 무엇을 배치하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언하면, 그 작품이 예술가에게 성공인지 아닌지는 그것이 전시되는 환경 속에서 맥락상의 변형을 만들어내어, 그 그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관념과 세계관을 동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예술가가 관객들이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때에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종종 새로운 문제들로 대체된다. 예술작품이 첨단 기술을 사용할 경우, 예술가는 그것이 자신의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서는 예술가가 직접 프로젝트의 기술적 측면을 다루지 않고, 자신의 콘셉트를 스펙터클성(性)과 혼동하지 않도록 그 일을 누군가에게 대신하게 하는 것이 테마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에 유리하다. 결국, 지금 이 시대에 뭔가 표현을 하려면, 그것을 사용하든지 사용하지 않든지, 자신이 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그런 시대인 것이다. 


최신의 기술과 오독의 가능성 


미디어 아트는 기술을 멀리 하는 게 아니라 외려 그것과 보조를 맞추어 왔으므로 당연히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어떤 것인지 보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한 작가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 가치가 이해될 수 없다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유화가 최신의 기술이었던 시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유화를 시도하여 실패하기도 했다. 그것은 유화에는 프레스코에는 없는 표면의 광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광택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유혹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유화에 도전하여,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자신의 ‘것’(표현)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다빈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유화기법의 마법에 빠졌지만 그것을 자신의 표현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화가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성공한 예가 은밀히 전해져, 그것이 순식간에 널리 퍼졌던 것이리라. 


지금 이 시대에 최신의 기술을 사용하는 데에도 그와 비슷한 문제가 있다. 그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을 경우, 그것은 그 기술에 함몰되어 버려 그저 ‘데모’로 전락하는 것이며, 작품 이전에 기술적 도달점이 전면에 나타나 버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아트는 기술적으로 완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언제라도 예술가가 의도했던 대로 반응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반응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제까지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이었기 때문에, 작품이 움직이지 않을 경우에는 거기에 배치된 사물(하얀 스크린과 잘못된 인터페이스)이 작품으로 해독되어 버리는 불행이 생기고 만다. 


이 점에서 또한 미디어 아트는 세잔 이래의 현대예술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세잔은 의도적으로 캔버스 전체를 모두 물감으로 발라버리지 않고 여백을 남겨두곤 했다. 완성을 시켜서 화포가 물체가 아니라 영상 이미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 그 이전의 회화의 기능이었다면, 세잔의 이런 기동은 화가라는 개인이 화포와 물감의 관계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마치 그는 “완성을 시킬 것이라면, 사진을 사용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잔은 회화를 이미지 투영의 장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사고의 현장으로 변화시키려 한 최초의 화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미디어 아트의 문맥이란?


기능이 확실히 작동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과학계몽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과학실험기구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당시 파리에는 플라스코와 비이커, 알콜 램프에 마그네슘 분말 등을 섞어 기괴한 실험을 공중의 앞에서 행하는 사이비 과학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전통은 연금술사의 역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러한 브리콜라주가 현대의 과학의 기초를 만들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내 자신, 이제까지 실로 많은 미디어 아티스트와 친교를 맺어왔지만, 그 다수가 복수전공의 학위를 갖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애매하게 두 갈래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뿐이다. 이것은 20세기 예술의 콘텍스트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확실히 다르지만, 그것은 새롭고 또한 매우 흥미롭다. 현대예술을 흉내 내려다가 실패한 작가들도 있는가 하면, 그와 전혀 관계없는 작가들도 있다. 엔지니어가 예술가라는 혼란한 논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긴 안목에서 보면 21세기의 예술은 궁극적으로 이쪽과 관계를 맺어 갈 것이라 말하는 작가도 있는 등,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필한 것은 우선 양이 아닐까? 대량으로 만드는 것, 보여주는 것, 보여주는 것이 지금 현재 가장 필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다시 미디어 아트의 영역으로 돌아오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의 기능을 적절하게 조명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의 미디어 예술 작품에 실험적 셋업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한다. 미디어 아트의 핵심은 그것이 미디어를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이다. 반면 수용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미디어 아트가 새로운 기능을 가진 새로운 미디어를 제안하며, 인간과 기계, 관객/사용자와 예술가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새로운 관계의 실행은 실험적인 작업, 하지만 다빈치가 유화라는 첨단 기술에 도전했던 것과는 좀 다른 성격의 작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것은 새로운 복제기술을 적용하기 위한 숙련의 획득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자와 수용자 사이의 새로운 관계 내에서,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세팅 안에서 예술작품의 형성을 묻는 새로운 미디어 자체의 구상과 실현이어야 한다. 


미디어 아트작품의 위치 


작품과 시스템이라는 말을 간단히 연결시켜 사용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물질적인 근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원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복제기술 그 자체 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종이 등의 물질에 출력한 것을 작품이라 부르지 않는 한, 얼마든지 무한히 복제(정확히 말하면 복제와 동일한 것)가 가능하다. 이는 확실히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작품의 ‘개인적 발상’. ‘독창성’, ‘재현불가능성’이라는 생각에 반하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디어 아티스트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아트’라 표방하는 것일까?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결국 “아티스트는 신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현실의 대상에 현실의 것을 투사함으로써 현실세계를 인식하고, 그 결과로서 작품이 남는다.”는 도식에 미디어 아트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디지털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미디어 아트는 사물을 다루는 예술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이외의 방법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사물이 아니라 ‘시스템’을 제시하는 방법을 채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변용하는 움직임을 수반하는 시스템일 수도 있고, 보는 쪽을 움직이게 만드는 시스템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디지털 미디어라는 비물질의 요소를 다루는데, 여기서 어떻게 미디어 아티스트가 자신의 작품과 현실 사이의 연결을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제까지 ‘인터랙티브’라는 말이 우세를 점해왔는데, 그것을 넘어 사용자와 작품, 사용자와 작가, 사용자와 사용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면, 단순하고 기술적으로 참신한 인터페이스만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랙티브 아트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거기서 생겨나는 새로운 관계성의 디자인이 미디어로서 기능하는, 그러한 시스템의 창조야말로 미디어 아트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디지털화/ 정보화의 차이 


그런데 ‘디지털화’와 ‘정보화’는 전혀 다른 작용이다. 60년대 이후의 계산기 기술이 사회에 가져다준 공포는 인간에 번호를 붙여 계산기에 의해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본래 정보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인간 자신을 수자로 치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확정적이며 수치화하가 불가능한 존재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수치화될 경우 아내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이 숫자를 매개로 하여 공개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정보화가 불가능한 대상을 무리하게 정보화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사실 우리가 아직까지 숫자로 변환되지는 않았다 해도, 정보화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화라기보다 기호화라 부르는 게 이해하기 더 쉽겠지만, 사과라는 과일에 ‘사과’라는 명칭을 붙이거나, 출발하기 전에 지도를 노트에 그리거나, 건축가가 스케치를 하는 작업은, 비록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명확히 대상을 이해하여 그것을 별개의 형태로 포착하는 작업이기에 정보화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주소와 연락처를 가르쳐 줄 때에 직접 종이에 써서 그것을 넘겨주는 것은 정보전달의 방법으로서 이제까지 보편적으로 통용되어 왔다. 혹은 적어도 친절한 행위로 흔히 행해져 왔다. 그러나 웹 홈페이지에 전자 메일의 주소를 올려놓는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스팸 메일을 대량으로 받는 결과를 초래하여 누구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 나아가 이런 문제가 생기는 사건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란 정보화와 정보의 처리에 관한 리터러시의 문제이며, 컴퓨터에 의해 정보가 처리되는데 리터러시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이다. 계산기가 만들어내는 공포란, 정보화(기호화)가 아니라, 실은 뭐든지 숫자로 만들어버리는 디지털의 힘에 대한 것이다. 


디지털의 위협


디지털화란 대상의 수치화를 가리키는데,  디지털화의 진정한 공포는 그 수치화의 수법에 있다. 우선 모든 문자를 ASCII 코드라는 숫자로 치환하는 것이다. 이미 수만의 일본의 문자가 숫자 코드로 처리되고 있다. 


‘あいうえお’의 ‘あ’가 숫자 ‘82A0’(16진수)가 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코드화하지 않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특정한 시기에 모두 그 숫자가 ‘あ’를 가리키도록 결정한 것뿐이다. 이것이 무섭다. 편의성 때문이라고 해도 숫자라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섭다. 이 공포는 나지 않는다. 알다시피 이 공포는 점점 더 퍼져나가, 음악이 숫자로 되어 버렸다. 디지털 샘플링이라는 기술로 음악의 세기를 1초에 44,100회 계산하여 그 양을 디지털 기술로 수치화하여 기술할 경우, 8비트의 샘플링이라면 연속한 256까지의 수치로 음악을 기술할 수 있게 된다. 화상과 마찬가지로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도 색채를 나타내는 숫자의 연속으로 표현하여 간단히 메일로 보내거나 받거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치화의 프로세스는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의 정도는 인간의 지각능력과 측정기의 코스트의 밸런스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음악의 44.1KHz 샘플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는 금후 개선되어가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시간을 잘게 써는(chopping)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치화의 공포란, 현실의 단편이 어떤 숫자가 되면 연산이 가능해진다는 데에서 온다. 음악이라면 편집을 하거나, 효과를 집어넣거나 할 수 잇게 됨은 물론이다. 그것이 음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음을 계산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영화의 세계에서는 CG로 인해 배우가 필요 없어졌다는 논의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영상에 한정해 말하자면, 현실의 완전한 시각적 복제가 가능해져 가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미 ‘렌즈 플레어’를 시뮬레이션하는 메뉴까지 가능해졌고, 나아가 속눈썹에 의해 생기는 확산광의 시뮬레이션한다는 논문까지 제출되어 있는 상태다. 이로써 인간의 시각에 포착된 세계 그 자체를 영화화하고, 눈물을 흘릴 때에 보이는 시각세계와 졸릴 때에 보이는 시각세계까지 영상화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인간의 눈의 시스템이 가진 결점까지도 재현하려는 이런 경향은 인간을 더 맹목적으로 만들어 세계를 더 잘 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버린다. 


데이터 공간과 현실을 연결하기 위한 인터페이스 


당연한 얘기지만, 음성 데이터와 화상 데이터만이 아니다. 인터넷을 통한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이라 불리는 수법이 새로운 정보 집적의 수단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일종의 통계학이지만, 네트워크 위의 데이터는 시시각각 변하며 신선하게 살아있다.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이터를 스냅쇼트 하는 게 아니라, 외려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그 데이터를 인식한다’는, 그런 접근방법을 취하는 게 가능해졌다. 현실을 알려면 현실과 인터랙티브하게 관계를 맺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데, 다만 그 수법이 디지털에 의해 크게 변한 것이다. 디지털에 고유한 이러한 환경과 방법이 일반화하여, 현실과 데이터 공간(사이버스페이스라 불러도 좋다)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와 그것을 다루는 리터러시가 몸에 배면, 이들 두 개의 이질적 공간의 구별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 둘이 융합한 상태야말로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공포는, 현실이 수치화되어 계산 가능해져 간다는 감각이 머잖아 현실에 대한 접근을 역전시켜버려, 그 결과 현실은 모두 심볼(기호)의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아직 기호화하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가져왔던 현실의 존재감이 희박해져 버릴 것이다. 혹은 그 희박한 것을 현실감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 뭔가 흔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심볼로까지 변환시킨다는, 극히 인간적인 창조행위가 쇠퇴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미디어 아트는 새로운 시스템을 제시하는 장치라고 썼다. 미디어 아트는 이미지를 인터랙티브하게 다루는 화경을 만들어내어, 그것이 심볼로 편성되어 가는 과정을 사용자와 공유하는 것이며, 그 심볼(token)을 통해 작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은 데이터 공간과 현실을 연결하기 위한 인터페이스를 제안하고, 그것들이 융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형에 의거해 시뮬레이션 하는 장치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이는, 이제까지의 미술예술처럼 ‘이미 존재하는 심볼과 아이콘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감상자가 회화를 그러한 흐름에서 읽는다’는 20세기적 관습과는 상이한 지점에 서있는 것이며, 위에서 기술한 디지털화의 공포를 향한 모종의 훈련으로서 현대에 제시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기에 대한 경종이 외려 미래에 대한 밝은 제안이 된다는 양가적인 입장을 취하는, 하나의 불가해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